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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하게 먹방/¶ 시엄마의 밥상

유품으로 남겨진 15년된 브랜디 형제를 떠나보내는 추억

by 노랑생각 2018. 3. 22.

부엌 한켠 긴 장 속에 오래된 브랜디가 있다.

병입 날짜를 보면, 각각 2003년, 2004년이니 거의 15년된 술.

운동과 함께 술을 끊은 남편,

딱히 일이 없으면 술을 마시지 않는 내가

이 브랜디를 이리 오랫동안 끌어안고 있었던 이유는 단 한가지.

돌아가신 시아버지의 물건이기 때문이다.

시아버지는 술을 참 좋아하셨다.

결혼하고 1년반 뒤에 돌아가셔서 술 마시는 모습을 몇번 본 적이 없지만, 가족들의 말을 들어보면 가정 생활에 문제가 될 정도로 술을 좋아하셨다고 하니.. 징글징글하게 좋아하는 수준이었던 것같다.

 

시아버지는 어느해 가을, 갑자기 돌아가셨다.


밭에서 배추를 뽑다가 쓰러지셨고  가까운 병원으로 빠르게 옮기고 처치했지만 그대로 돌아가셨다.

소식을 듣고 남편이 부리나케 회사에서 나와서 가는 길에 이미 돌아가셨다.

갑작스러운 초상.

장례식장을 말 그대로 초상집이었다.

아직 환갑이 되지도 않은 젊은 죽음.

아들을 낳은 큰아들, 이제 막 공부를 다한 둘째 아들..

어쩌면 이제부터가 행복할 수도 있는 그런 시점에 '이제 할 일을 다했으니'같은 상황에 돌아가셨으니

억울하고 침통한 분위기가 무겁기만했다.

15년된 브랜디 3형제는 그렇게 돌아가신 아버님 집에서 나왔다.

갑작스러운 죽음 뒤에 남겨진

고인의 애장품은 자꾸 그 사람을 호출한다.

돌아가시던 날 아침, 썰어먹은 김치가 남아있는 도마

급하게 나간 흔적이 있는 어수선한 집안..

금방이라도 주인이 돌아올 것같은 집 한쪽에 고이 모아둔 술이었다.

다 버려도 아쉽지 않은 물건들 속에서 가족들은 뜯지도 않은 브랜드와 큰 병에 담궈둔 자라알술.. .그렇게 술만 4병을 챙겼다.

어쩌면, 평생토록 가족들에게 나쁜 기억만 만들어준 술인데

죽음의 자리에서 챙길 것도 술뿐이 없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했지만 그나마 새것이고, 보관이 가능한 것은 이 술 뿐이었다.

그렇게, 아무도 먹지 않는 술이 우리 집에 온지 14년쯤 된 것이다.

긴 시간이 지나면서 이 술이 시아버지의 것이었다는 기억도 희미해지고

차지하고 있는 자리에 다른 물건을 넣고 싶어졌다.

워크샵에 가져가 마실까
술 좋아하는 누군가에게 줄까
콸콸 부어버리기보다는 어딘가 쓸모는 있게 치우고 싶었기에 어쩔까어쩔까하면서 몇달을 더 끌어안고 있었다.

결국 온라인에서 술을 좋아하신다는, 아들들이 놀러오면 드시겠다는 할머니께 1만원을 받고 팔았다.

잘 먹겠다고, 아들들이 술을 좋아한다고 하며 무거운 3병의 술을 들고 가시는 분을 보며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시아버지가 남긴 브랜디 3형제는 그렇게 필요한 사람에게도 갔다.

장기를 제공해서 다른 사람을 살리는 기분.... 만큼은 아니지만 그런 비슷한 기분이다.

시아버지의 유품아닌 유품인 브랜디를 보면서 시아버지를 종종 떠올렸다. 

하지만, 이제는 브랜디보다는 이렇게 기록으로, 추억으로 남겨놓고 물건은 보내야겠다 싶다. 

어차피 죽은 자를 기억하는건 물건때문이 아니라 애정 때문이니까.



이런 에피소드 또한 시간이 지나면 기억나지 않을테니 추억이 되도록 이렇게 기록해 놓기로 하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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